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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과 서독 통일의 역사 도시 베를린

by 선라이저 202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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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라는 역사를 가진 독일의 베를린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 20개 이상의 문화도시가 지정되었습니다. 선정된 문화도시에는 국비를 비롯해 200억원이 지원됩니다. 문화도시마다 유럽의 문화도시처럼 특색있는 테마를 가진 도시가 되었으면 해서 유럽의 도시를 정치, 역사, 친환경, 미술, 축제, 미식, 건축 등의 테마별로 다루고 있습니다.

 

1.  베를린 도시 개요

 

  베를린이라는 지명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1244년으로 자매도시 쾰른이 역사에 기록된 것보다 7년 늦게 입니다. 두 도시 모두 동서교역로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상업적 조건에 힘입어 발전하였으나 두 도시가 합쳐지면서 베를린이라는 지명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두 도시의 건설 시기는 이 지역의 게르만족 부흥시기와 일치하는데 예전에 자신들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빈 지역을 슬라브족이 들어와 살던 도중 되돌아온 게르만족이 이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지금도 베를린의 상징은 도전적 자세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검은 곰입니다.

 

베를린의 상징 검은 곰
베를린의 상징 검은 곰

 

  중세때 베를린은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종교 분쟁 때 베를린은 프랑스에서 억압받던 위그노, 서부 독일의 그리스도교 및 유대인 등 우수한 시민들을 받아들여 상업과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켰습니다. 1810년 베를린대학이 설립되어 유럽의 유서깊은 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학문의 중심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871년 독일제국의 창건은 베를린이 훨씬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베를린은 독일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가 되고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북 독일평원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는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파리보다 약 8배 크기의 규모로 유럽에서 5번째 도시이고 인구수는 약 370만명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입니다. 베를린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고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베를린의 영광은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종말을 맞아 하였습니다. 패전으로 베를린은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4개국 관리하에 놓여졌고 마침내 독일의 수도라는 기능조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를린은 독일인의 성실함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현대적 감각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지금도 베를린에는 현대적 건물들이 곳곳에 건설되고 있어 현대 건축의 현황을 파악하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 독일 통일의 역사적 현장 베를린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갑작스럽게 붕괴될 때까지 30여 년간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습니다. 장벽의 일부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지만 베를린 시는 역사적 보전을 위해 장벽이 해체된 후 20년 만에 복원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장벽 설치의 직접적인 배경은 독일의 2차 대전 패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이전의 얄타회담에서 4개국이 분할 점령해 군정을 실시함과 동시에 베를린도 분할 점거하기로 되어 잇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서방 3개국의 경제, 행정상의 의견 차이는 점차 벌어지다가 1948년 3월 소련은 공동위원회에서 탈퇴하고 6월에는 서방 3개국이 관리하는 서부독일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모든 교통로를 차단함으로써 '서베를린 대륙봉쇄'를 단행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미국 주도의 서방 3개국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송기를 이용하여 11개월간 서베를린으로 생필품을 실어나르는 공수작전을 폈습니다. 서방의 끊임없는 공수와 외교적 협상을 통해 결국 소련은 봉쇄조치를 1949년 5월 해제했습니다.

 

  그렇지만 동독지역은 베를린 장벽이 쌓이기 전까지 이미 수많은 지식인과 기술자 등 250만명이 서독으로 탈출한 상태였습니다.  동독으로서는 심각한 인구유출이었는데 특히 엄청난 고급 인력의 유출은 동독의 미래에 암울하고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여기다가 동독지역에서의 민중봉기 등이 서방측과 연합해 이루어졌다고 판단한 동독 정부는 사회주의와 동독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서방과 모든 것을 단절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베를린 장벽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11월 16일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모든 경계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이후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10월 3일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329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1945년 4개국에 의해 분할된지 45년만이었고 1949년 동서독으로 나누어진지 41년만이었습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우일한 관문이었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1990년 6월 22일 철거되었으나 당시를 기념하기 위해 가짜 '체크포인트 찰리'를 설치하여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1989년 동독의 GDP는 서독의 50%에도 못 미쳤으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 현재는 70%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통일 후 동독과 서독간의 경제적 불균형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동독의 실업율이 서독의 2배이며 동독의 인구도 20년 동안 10%나 감소하였습니다. 

 

 통일 비용에 대한 부담감은 동서간의 심리적 갈등을 낳고 깔끔하고 잘 나가는 서독인을 지칭하는 '베시', 게으르고 멍청한 독일인을 지칭하는 '오시'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3. 결

 

  2차 대전 이전 베를린은 중유럽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문학 등 각 분야의 중심지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베를린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유럽 최대의 도시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명성을 자랑하는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는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상징입니다.

 

 베를린에는 미술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즐비한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과학기술박물관, 헬레니즘 예술품을 간직한 페프가몬미술관, 비잔틴과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 시대까지의 조각품, 생활용품, 장식품들을 전시한 베를린 최초의 공식 박물관인 고박물관, 중동,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마야, 아즈텍의 예술품이 전시된 민족학박물관, 유럽박물관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현대 건축물이 밀집된 포츠담광장은 현대 건축의  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흄볼트대학, 베를린대학은 베를린이 학문의 도시임을,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는 베를린 국립가극장은 공연예술의 도시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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