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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독립 (4) - 독립 이후의 싱가포르

by 선라이저 2025.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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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 이후의 싱가포르를 알아 보았습니다.

 

1. 독립 이후의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는 아무 것도 없는 조그만한 섬인 싱가포르가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 물자를 대는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레이시아에 속한 조호르 지역이 후방에서 받쳐줬고,말레이시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말라카 해협에는 냉전의 일환으로 이념의 대립이 있어서 수월하지 않았을 뿐, 싱가포르를 대체할 수많은 항구들이 있었다.

싱가포르 자체적으로 식량이나 식수 수급은 불가능했고 배후지역인 조호르를 통해 공급받았기 때문에 조호르의 여러 항구를 잃고 싱가포르항 한 곳만 경영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하고도 그런 역할을 지속하며 국가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었다.

 

 리콴유는 영국에 호의적이었고 영국과 말레이시아로 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과 절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인민행동당 인사들도 영국 유학파들이 많았다.

 

  독립 초기부터 리콴유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공산국가처럼 1당 독재로 국가가 직접 기획/통제하는'사회주의식 자본주의'를 창안했고, 국방 쪽에선 자신들을 지킬 국방력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과 별개로 공산당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서 공산주의자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미국, 영국, 서유럽 등 다양한 국가들로 부터 무기를 수입했고, '적으로 둘러싸인 소국'이라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스라엘로 부터 무기 구입 및 군사 자문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영국군 기지를 반환 받으면서도 동시에 셈바왕 쪽 기지 임대 연장을 허용했고, 미군 주둔기지설립을 허용했다.

 

2. 싱가포르의 인종 정책

 

  싱가포르는 연방 축출이 인종 간 갈등에서 시작된 것을 반성하여 신생 싱가포르의 인종 갈등 문제를 없애는 것에 주력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75%라 공공연하게 중국계를 우선하거나 중화권 문화를 밀어줄 경우 자칫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의 반발을 살 수 있어 의도적으로 중국 문화를 배제하고 다인종 다민족이 공존하는 싱가포르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물론 현재는 표면상으로 화합으로 보이나 실은 안 보이는데선 차별이 존재한다. 다만 이를 대놓고 발언하는 경우, 싱가포르 내에서 상당한 비난에 시달린다.

 

  헌법상 국어를 말레이어로 지정하고 할랄푸드 인증을 적극 추진해서 원주민 말레인인들을 존중해주는 한편 인종 간 소통을 위해 제 1언어로 영어를 지정했고, 중국계 싱가포르인의 언어 통합을 위해 표준 중국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간자체를 도입하는 등 중국계 언어 통합에도 노력을 가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들의 모어는 광동어, 객가어, 민어 등이고, 이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오늘날 중국계 싱가포르인 내에서는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 중국어를 쓴다.

 

  그리고 1960년 만들어진 주택개발국(HDB)을 통해 중국계 싱가포르인 , 인도계 싱가포르인 , 말레인인의  화합을 자연스럽게 추구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개인들의 주택 구입을 촉진하기 위해 1968년 우리나라 국민연금와 유사한 중앙적립기금(개인이 20%, 회사가 20% 부담)의 일부를 공공주택 구입에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주택에서는 영어로 소통하고 같이 살고 같이 식사하고 학교에서도 친구로 만나며 세 민족은 자연스럽게 이웃사촌으로 친구로 융합되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해 엄격한 법 집행을 실시해서 혐오 표현을 검열하고 여권 등 신분증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하며 공립학교 교사도 각 인종을 111로 배분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인종 및 민족 간 통합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싱가포르 내각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미푸트라 정책 탓에 인종 갈등이 극심하고 극우주의자가 판치며 혐오 표현이 난무하는 옛 모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등 갈등으로 몸살을 앓은 이웃 인도네시아, 민다나오 내 무슬림을 품지 못해 골칫거리가 된 필리핀 등과 비교할 때 상당히 높은 성과이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주변국에 비해 소국임을 인식하여 중국계 인구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는 중화권이 아닌 동남아시아의 일부 임을 주변 국가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신뢰를 쌓게 된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영국, 미국 등 영어권과도 더 밀착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싱가포르는 중국과의 거리를 두기 위하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까지 일부러 수교를 맺지 않았다. 비록 중국과 싱가포르는 거리를 두었지만 중국과도 싱가포르의 상황을 이해해서 이에 대해 무리한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당시 싱가포르는 아직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선발주자인 영국, 대만, 홍콩, 일본, 호주 등은 물론 현재는 싱가포르로 노동력을 송출하는 태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처지였다. 싱가포르 관광지인 주롱 새 공원(Jurong Bird Park)에 가면 모노레일에 타이항공 로고가 그려져 놓고 있는데 이 때 모노레일을 놔준 나라가 태국이어서 그렇다. 현재도 태국 정부는 양국 우호협력의 상징으로 이 모노레일을 예로 들며 뿌듯해한다.

 

  독립 이후 싱가포르는 라만의 말처럼 말레이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남아의 공산화 바람이 사그라들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에 비해 비교적 친서방적인 독재자 수하르토가 들어서면서 동남아 정세가 싱가포르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 큰 위협 없이 살아남게 된다.

 

  한편 싱가포르는 독립하면서 도시국가가 되어버려서 리콴유의 급진적인 정책들이 바로 바로 효과를 발휘하는데 최적의 환경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런 정책이 먹혀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민에 대한 독재 수준의 통제가 필요한데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통제가 쉬워져서 오히려 리콴유 일가의 지배 하에 급속도로 사회를 통합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독립 이후에는 한국, 홍콩 등의 성장 방식처럼 제조업을 통하여 경제를 성 시켰으나 규모가 워낙 작은 나라라 일본, 한국 등의 덩치가 있는 나라들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물류를 다루는 방향으로 경제를 성장시켰다. 물론 이 역시도 홍콩, 한국, 대만 등과 경쟁을 해야 했고 홍콩이야 비슷하지만 한국, 대만과는 덩치상 게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금융 쪽으로 먹거리를 선회하여 세금을 없애고 좋은 기업들을 유치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이러한 적절한 경제정책의 변화는 싱가포르를 개인 소득에 있어서는 굴지의 부국으로 만들어 주었다.

 

  독립 후에는 말레이시아와 페트라브랑카 분쟁이라는 영토분쟁을 치른 바 있다. 섬의 실효지배 문제 등으로 인해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참고된다. 이 섬은 포르투갈린들이 말라카를 정복할 무렵 같이 정복한 무인도로 페드라 블랑카라는 이름은포르투갈어인데 조호르 쪽에 붙어 있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뒤 문제가 되었고 한 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해군이 대치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싱가포르의 실효지배가 인정되었다.

 

  이 섬의 싱가포르 영유권이 인정된 이후 스페인 - 모로코 사이에서 2005년 페레힐 섬 문제가 터지면서 이 문제에서 또 한 번 이 섬이 언급되었다. 독도 문제와도 관련 있는데 실효 지배가 인정받은 케이스라 일본이 이 판결을 매우 불쾌해하기도 했다.

 

 1990년에 리콴유 총리는 고촉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 노릇을 했고, 2004년부터 리콴유 총리의 아들 리센룽이 취임(52)하여 2세 통치가 시작됐으며, 2024년 로렌스웡이 취임하였다.

 

리콴유 총리
리콴유 총리

 

3. 결

 

 

 싱가포르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인 화교가 75%인 나라이다. 이웃한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와 달리 화교를 별도로 차별화하지 않는 곳이다. 세금도 매우 낮아 다국적 기업들이 몰려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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