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싱가포르의 역사 (1) - 영국 식민지 시절

by 선라이저 2025. 6. 12.
728x90
반응형

  2025년 6월 20일 조찬 포럼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역사'에 대해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싱가포르를 영국 식민지 시절과 리콴유의 집권 부분 등으로 나누어 공부한 내용을 나누어 본다. 

 

1. 영국의 식민지 싱가포르

 

 1819년 동인도회사의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가 싱가포르를 말레이반도의 무역 전초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싱가포르의 역사는 시작된다. 영국은 1,000명 밖에 안 사는 깡촌이었던 센토사 섬에 조호르 왕자 후세인 샤를 술탄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영국의 영향 아래에 집어넣어 버렸다. 래플스는 이후 4년 동안 싱가포르를 오지에서 어엿한 항구도시로 발전시켰다.

 

  덕분에 래플스는 리콴유 초대 총리와 함께 싱가포르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싱가포르에 처음 상륙한 싱가포르강 지점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석상이 세워져 있고, 싱가포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래플스(raffles)라는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그마한 섬이 어떻게 단기에 무역항으로 변모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래플스가 속해 있었던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부터 차를 수입하고 있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엄청난 양의 차를 비싼 가격으로 수입하였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는 늘어만 갔다. 이 때 영국이 생각해낸 것이 아편이다. 이 아편은 인도에서 재배되어 말라카해협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대가의 중국의 은이 유럽으로 흘러가게 것이다. 동인도회사는 이 무역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싱가포르가 그에 딱 맞는 무역항이 되었다.

 

  이 때 래플스가 선택한 전략이 자유무역이었다. 당시만 해도 무역을 위해서는 세금을 내야만 했던 데다 많은 통제까지 있었지만, 싱가포르가 자유무역 항구를 선언하면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무역뿐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무역까지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유무역 정책은 당시 경쟁 항구였던 네덜란드령의 말라카 항구를 앞서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 싱가포르의 발전

 

  싱가포르가 무역항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면서 중국계 화교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싱가포르로 유입되었다. 다민족 국가와 무역항으로서의 싱가포르 역사가 자유무역항 정책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영국은 여러 인종을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영국은 주로 말레이계를 경찰이나 군대에, 인도계는 상업과 금융(대부업)분야에, 중국계는 노동과 무역 분야에 종사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각자의 핏줄을 자각했기에 다른 동남아 식민지와 달리 싱가포르 내엔 민족주의가 싹트지 않았다. 당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영국과 손잡은 반면, 인도계 싱가포르인의 경우는 반영국 사상이 짙었다. 말레이인들은 중립적이라서 영국 식민정부에 많이 협조했다.

 

  싱가포르의 군사기지화는 제1,2차 세계대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20세기 초 인도계 무슬림 용병들은 자신들이 오스만제국으로 보내져 무슬림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자, 191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 이후 영국은 적극적으로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도크가 건설되고 영국 해군이 6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연료 탱크가 건설되었으며 공항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완성되기 전에 일본이 쳐들어오는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래플스 동상
래플스 동상

 

 

3. 결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끝단에 있는 나라이다. 래플스라는 수마트라 지역의 영국 부총독에 눈에 띄여 본격 개발된 점이 흥미롭다. 래플스는 싱가포르를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구분하고, 주거지역에는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 등으로 구분해 살도록 설계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