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싱가포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였다가 탈퇴하면서 독립하는 과정입니다.
1. 싱가포르의 독립
종전 후 시간이 지나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혼란스럽던 싱가포르를 영국이 공산주의를 소탕하면서 화교 학교를 공격해 영국이 화교를 공격한다는 인식이 생겨 영국에 반감을 가지게 된 싱가포르 또한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의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말에이인이 다수인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이 경제 권력을 쥐고 있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중국인이 대다수인 싱가포르는말레이시아에게는 위험한 존재였다.
싱가포르에서는 화교의 인구 수가 말레이인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사실 싱가포르만 그런게 아니라 싱가포르보다 화교 비중이 더 높은페난 등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들도 있었고 당장 수도인 쿠알루룸푸르부터 중국계 인구가 많았다. 또한 식민지 시절 대영제국이 말레이시아를 싱가포르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앙금이 크게 남아 있었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대국들이 많은 동남아에서 혼자서 살아가기 어렵다고 보았기에 말레이시아연방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다. 말레이시아는 당시 동남아에 퍼져나가던 공산화에 두려움을 느꼈고 1948년에 말레이 공산당이 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싱가포르에도 예외 없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공산당 활동을 아예 막았다.
영국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증가하자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하였지만 식민지 국가를 더 이상 유지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법회의를 구성하여 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기반을 싱가포르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영국이 조건부 자치를 승인했고 1959년에 인민행동당이 창당됐다.
하지만 합병 이후 말레이계 우대 정책에 대한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고, 리콴유 싱가포르주 총리와 싱가포르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인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인종이 말레이시아인이다'는 주장을 하며 연방 내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 이들은 심지어 말레이인들의 지지 또한 얻기 시작하였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이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합병할 때부터 인민행동당이 연방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싱가포르 내에서만 정치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당시 말레이인들의 생각은 중국인은 너무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교육 수준이 말레이인들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 보다 좋은 경우가 많았다. 미국, 영국, 유럽, 남아메리카 등에서도 동아시아계는 학습열이 높기로 유명한데, 국적이 달라도 중국계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화교들의 경우에도 이것이 똑같이 작용한다. 유입 당시 이들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자본력이 높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중국계 싱가포르인와 말레이인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한다면 곧 중국계 말레인들이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고, 말레인들은 낙오될 것이라는 것이 말레이 정치인들이 갖고 있던 공포감이었다. 이는 실제로 동남아 국가 대부분에 공통되는 현상이다. 화교가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지역조차 경제는 화교의 수중에 있었다. 오히려 경제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기에 견제 차원에서 탄압이 가해지는 측면이 있다.
싱가포르 인접국인 인도네시아는 중국계 화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는 중국인 노동자를 수입하고 중국계를 무역 중계상으로 활용하면서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당연히 네덜란드에 부역하는 중국계에 대한 인도네시아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고, 그 결과 인도네시아 정부는 독립과 함께 화교에 대한 차별정책을 시행하여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59년에는 한자와 중국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배경하에서1965년 수하르토가 쿠테타로 집권하면서 반공산주의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화교가 학살되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안보 위협을 느낀 싱가포르는 독립국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는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편입되는 것을 선호하였지만 말레이시아와의 통합이 쉽지 않았다.
2.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그리고 탈퇴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 동지였지만 합병 이후에는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시아의 정치를 장악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리콴유와 사적으로는 친하지만 공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즉 연방으로 받아준 싱가포르의 화교들이 오히려 말레이시아 정부를 장악하여 말레이인을 위한 정책이 아닌 화교 또는 마오쩌둥주의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까봐 두려워했다. 반면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의 말레인인우대정책을 이해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정치인들의 정책은 인종 갈등만 야기시키고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의 통합을 추진하였고1962년 말레이 연방 통합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70% 이상의 찬성을 이끌어낸다.
1963년 싱가포르가 공식적으로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한 지 얼마되지 않는 중에 결국 싱가포르에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1964년7월 21일 25,000명, 212개 단체의 말레이계 무슬림들이예언자 무함마드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던 도중 중국계와 충돌한 것이다.
리콴유는 이에 빠르게 중앙 정부에 진압병력을 요청하고 야간 통금을 시행하여 대응했다. 사건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리콴유는 외부 세력이 개입했으며 배후에 인도네시아와 중국계 공산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11일간 지속된 시위로 건물 수백채가 불타고 36명이 사망하였으며,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9월엔 중국계가 주로 주거하는 지역에서 삼륜차를 몰던 말레인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자 또 다시 대규모 분쟁이 발생하여 13명이 죽고 103명이 다쳤다. 인종 갈등이 결국 극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에 라만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하나는 강경파인 리콴유를 구속하여 제거한 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을 싱가포르에 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말을 안 듣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라만은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다.
라만은 먼저 리콴유에게"우리가 하나의 연방에 있을 때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다른 독립된 국가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친구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싱가포르에게 연방 의회의 의석을 포기한다면 국방과 외교 분야를 제외한 완벽한 자치를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리관유는 이 제안을 고려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가 연방에 잔류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리콴유와 그의 정부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하여 분리 독립하기로 한다. 1965년 중순에 이르자 완벽한 독립으로 마음을 굳힌 리콴유는 마찬가지로 연방 잔류에 회의적이었던 오른팔인 고켕스위(吳慶瑞, Goh Keng Swee)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라작 부총리와의 회담장으로 보낸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분리 독립에 동의하고, 분리독립 계획이 외부로 새어 나가면 일어날 소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기밀을 유지하고 기습적으로 독립을 발표할 방법까지 전부 합의했는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독립에 합의하고 서는 마치 싱가포르가 일방적으로 분리독립을 "당하는" 것처럼 연출하기로 하였다. 싱가포르는 이 시점에 말레이 연방에 잔류할 수는 없었다. 리콴유가 독립을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고, 도시국가가 아주 불리한 여건임을 알고 있었지만, 불가피하게 홀로서기를 택한 것이다.
합의된 독립이든 표면적으로 보이는 강제 독립이든, 싱가포르는 경제적 배후지를 잃고 상당히 힘겹고도 불가능에 가까운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합의라고 하나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의 축출을 강렬히 열망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양측의 합의대로1965년 8월 7일에 라만은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을 불러 일방적으로 추방을 선포하였고,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는 싱가포르를 축출하는 법안인 헌법 개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같은 날에 리콴유는 눈물을 흘리며 독립을 선언하는 모습을 연출하였고, 싱가포르는 자주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이렇듯 널리 알려진 대로 중국계 인구가 많은 싱가포르가 먼저 독립을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싱가포르 역시 뜬금없이 '독립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연방이 와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끝까지 라만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싱가포르가 축출되면서 영국 정치인들은 상당히 실망하게 된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의 연방 축출을 대환영하였다. 당시 말레이시아와 갈등을 벌이던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 북부의 사라왁과 사바가 연방에 가입하는 것 자체를 상당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결국 이 둘은 결국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똑같이 희망하던 브루나이는 술탄의 권력 문제로 끝내 말레이 연방 가입을 거부하고1984년에 독립국으로 홀로서기에 나선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연방 자체를 영국의 신식민주의라고 정의 내리고 있었으며, 특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공공연하게 반서방 성향을 드러내며 사라왁, 사바에 민병대를 보내고 싱가포르에 군사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라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축출이 인도네시아의 승리, 말레이시아의 패배라고 생각하며 좌절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는 영국에서 평화적으로 독립해서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며 독립을 이뤄냈기에 반서방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나중에 싱가포르 입장에선 터닝포인트가 될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3. 결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였다가 이를 원하지 않는 연방 정부로부터 3년 만에 반강제적으로 탈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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