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들어오는 경계인 문경새재를 제3관문부터 제1 관문까지를 걸어서 넘으면서 왜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이 조령을 지키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후퇴하는 선조와 함께 하였던 유성룡의 징비록 속에 그 해답이 있어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신립 장군의 사람됨 : 장수로서 자질 부족
임진왜란 직전 1592년 봄 선조는 신립과 이일을 보내어 변방의 군비 상태를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 황해도가 갔다가 한 달이 지나 돌아왔습니다. 점검한 것은 활과 화살, 창, 칼 따위 뿐이었고 군현에서는 모두들 형식만 갖춘 것을 가지고 법망을 피하며, 달리 방어에 대한 좋은 계책을 마련한 것이 없었습니다.
신립은 평소에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평판을 듣는 사람인데,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그 위엄을 세웠습니다. 수령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대접하는 음식이나 거취하는 숙소가 너무 사치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선조에게 보고한 후 4.1. 신립이 나를 찾아 왔습니다. 내가 묻기를 "머지 않아서 변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그대가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것인데, 오늘 날 적의 형세를 보아 적을 방어하기가 어떻겠소?" 하였더니 신립은 아주 적을 가볍게 보면서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날의 왜인들은 다만 짧은 창칼 따위만 믿는 처지였지만, 오늘날에는 조총과 같은 무기로 다른 장기까지 가지고 있으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하니 신립은 급히 말하기를 "비록 조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쏘는 대로 다 맞출 수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
나는 또 "조선은 태평세월을 누린 지 오래되었으므로 군사들이 약하고 겁이 많아서 과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적에게 항거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수년 후에 사람들이 사람들이 자못 군사 일에 익숙해지면 난리를 수습하게 될 지 알 수 없으나 지금 같아서는 매우 근심이 됩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신립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 배반한 오랑캐들이 함북 두만강변 군사 요충지인 종성을 포위하므로 신립이 달려들어 이를 구원하였는데, 그가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돌격하니 오랑캐들이 포위를 풀고 물러났습니다. 조정에서는 신립이 대장의 소임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하여, 북병사, 평안병사로 승진시키고 얼마 안 되어 병조판서를 삼고자 하는 형편에 이르니, 바야흐로 그 의기가 충천하여 조괄(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장수)이 진나라를 업신여기던 것과 같이 조금도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므로, 사리를 아는 사람은 그의 행동을 매우 근심하였습니다.
2. 신립이 충주에서 대패 : 길목을 놓치다
신립이 충주에 이르니 충청도의 여러 군현에서 군사들이 8천명이 모였습니다. 신립은 조령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일이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져서 충주로 돌아왔으며, 또한 이일, 변기 등을 불러 함께 충주로 오게 하여 험한 곳(조령)을 버려두고 지키지 아니하고, 호령이 번거롭고 소란스러우므로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친한 군관이 적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내밀하게 알려 주었는데, 이 때는 4.27. 초저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신립은 갑자기 성밖으로 뛰어 나가 군중은 소란해졌으며, 그는 밤이 깊어 객사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신립은 선조에게 "군관이 거짓말을 하였다"면서 끌어내어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왜적들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고만 하고 적병이 이미 10리 밖에 도착한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립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탄금대 앞의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왜적이 두 군데로 나누어 쳐들어 왔습니다.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채찍질하여 몸소 적진으로 돌격하려고 시도한 것이 두 차례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말머리를 돌려 간으로 뛰어들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원통하게도 왜적이 상주에 들어왔으나, 그들이 험한 곳을 지나갈 때는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문경에 옛 고모성이 있는데 적병들은 여기에 우리 군사가 지키고 있을까 두려워 두 세 번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키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나갔다고 합니다.
신립은 비록 날쎄어서 그 때 이름을 떨쳤다고 하더라도 전략을 세우는 데는 그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뉘우친다 하여도 소용없으나 그래도 후배에 경계가 되고자 자세히 적어 두는 것입니다.
3. 시사점
문경새제는 주변이 조령산(1026m), 주흘산(1075m) 등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었습니다. 임란 후에 차례로 3개의 관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습니다. 위기에 영웅이 난다고 합니다. 평화를 오랫동안 누려온 조선에 신립은 조선을 위태롭게 한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입니다.
부동산은 위치가 가장 중요한다고 합니다. Location Location Location. 문경새재는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추풍령은 시험에 가을바람처럼 떨어진다고 회피하였습니다. 과거를 치러다니는 길만 생각하다 보니 군사적인 Location 용도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란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약한 것이 조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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