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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은의 역습

by 선라이저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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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1592년 임진왜란과 연이은 정유재란 하면 이순신장군의 해전과 의병 승리를 떠 올립니다. 2023년 2월 3일 제가 매주 참석하는 포럼에서 이상국 교수가 발표한 내용 중 '임진왜란을 둘러싼 세계 정세와 일본의 목적 그리고 은의 역습'을 알아 보겠습니다. 

 

 1. 임진왜란의 배경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해양 세력이 대륙을 진출한 사건입니다.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트갈과 스페인은 1494년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임의로 선을 긋고 남북 지역으로 분할하는 조약을 맺었고 동아시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은 포르투갈은 마카오와 일본에 대한 선교와 통상무역을 선점하였습니다.  

 

  1543년은 역사상 각국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일본에는 조총이 전해졌고 우리나라는 훈구세력의 권력 남용으로 삼정이 문란한 가운데 권력에서 소외된 사림세력에 의한 주세붕의 소수서원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성리학과 이에 대한 교육을 우선시하는 조선 지배층의 시대정신은 과학과 세계화의 흐름을 무시하였습니다. 1555년 왜인이 부산에 귀화를 요청하면서 조총을 가져 왔습니다. 이를 본 신하들이 "낡은 종을 녹여 총통을 제작하자"는 건의에 명종은 "옛 물건은 신령한 힘이 있다"고 거부하였습니다. 1589년 대마도주가 조총을 헌상했으나 조선은 무기고인 군기시에 조총을 집어넣고는 아무런 조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는 14세기 후반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만들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572년 9세로 즉위한 만력제 신종은 명나라 황제 중 가장 긴 48년 간 재위 중 대부분을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해에 보바이의 난이 일어났으며 만력제는 처음에는 조선을 의심했으나 조선을 도와 고려황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585년 일본을 통일한 후 관백이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손에 쥔 금 부채에는 명나라, 조선, 일본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명을 정벌한 후에 자신은 상해 남쪽에 거주하고 정복한 명나라 땅에 다이묘 영지를 나누어주고 조선은 자주권이 없는 명나라의 번국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2. 은의 역습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한국에서는 조선 침략을, 일본에서는 명나라 정복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전국 통일 후 다이묘를 달래 줄 새로운 영지가 필요했다는 것과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성장한 상인들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필요한 자금을 1526년에 발견한 이와미은광에서 캐낸 은으로 충당했습니다. 이 은광은 1545년 볼리비아 포보시은광이 발견되기 까지 세계 은 생산의 60%(254톤)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은 제련 후진국이었습니다. 1503년 연산군때 은제련의 획기적 기술인 회취법이 발명되었으나 1533년 일본이 조선의 기술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면 조선은 왜 은제련 기술을 활용하지 못했을까요? 1429년 세종이 명나라에 '금과 은을 조공 물품에서 제외하여 달라'고 간청하여 조공 면제를 받은 후 실시한 정책은 은광 폐쇄였습니다. 금/은광 폐쇄는 조선 말기까지 일관되게 실시되었으며 밀매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경국대전에 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는 조선에 5만명의 군비조달을 은으로 할 것을 요청했고 임란 이후에도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조선은 명나라 조사에게 은 10만냥을 바쳐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를 본 율곡 이이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1894년 갑오경장에서 급납제와 함께 은본위제가 등장했고, 고종은 이를 통해 오랜 숙원인 근대적 화폐제도를 수립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금융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비싼 댓가를 치른 '은의 역습'이었습니다.

 

  15~16세기 볼리비아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중국으로 물밀듯이 들어갔습니다.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명나라가 1:6이었던 반면에 유럽에서는 1:12, 페르시아에서는 1:10, 인도에서는 1:8이었습니다. 소위 차익거래가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1572년 즉위한 만력제는 1580년 일조편법을 실시했습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지폐를 사용했는데 명대에 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지폐 사용을 중지하고 지불수단을 은으로 정한 것입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감합무역을 고집하면서 일종의 조공무역을 해 왔는데, 유럽 국가들도 은을 중국에 주고 도자기, 차, 비단을 사 갔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제1~9군 17만명의 병력 외에 3만명 6개의 특수부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금속부, 보물부, 축(가축)부로 조직적으로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이를 전기로 삼아 도자기 등에서 큰 문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일본은 임란 중 도공을 납치하면서 3년치의 고령토와 유약을 확보하였고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은 지방 영주의 보호하에 도자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이삼평의 아리타요에서는 1644년 한 해에 45,000점의 도자기를 네덜란드에 수출하였습니다.

 

  일본 근대화를 추진한 명치유신(1863년)은 사가현 출신들이 주도하였는데, 일본의 사상가인 시바 요타료는 "20년 남짓한 시기에 사가현 군사력이 경이적으로 강화되고 발달했다. 금속제련을 위한 가마를 막부보다 7년 빨리 완성해 신예 조총을 제작하고 암스트롱포 3문을 영국에서 구입하는 한편 동일한 제품을 만드는데도 성공했다. 또한 군함 몇 척도 구입했다"고 했습니다.

 

  시바 료타료는 무기구입액이 연간 15만석에 해당되는데, 그 대부분이 번이 전매하는 아리타 도자기의 밀무역(막부 몰래)을 통해 얻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에노전투에서 막부군을 괘멸시키고 막부가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카마쓰성을 함락시킨 것도 암스토롱포였고 막부의 해군을 무찌른 것도 사가번 해군이었습니다. 

 

   한편 자기를 제작할 수 없었던 조선은 임란 직후 선조가 신하들을 궁궐로 초대하여 대접할 자기가 없어 그러지 못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조선은 자기 기술 뿐만 아니라 기술자까지 모두 빼앗긴 것입니다.

 

 

맨 왼쪽 아래가 일본의 조선 침략기지 큐슈
맨 왼쪽 아래가 일본의 조선 침략 전진기지 큐슈

 

3. 결

 

 

  대항해시대에 들어가면서 전 세계가 은화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1580년 중국은 일조편법 세제로 결제수단이 은본위제가 되었습니다. 세계 은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던 볼리비아 포토시(60%)와 일본의 이와미(30%)의 생산량 중 30%가 중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6세기말 명나라는 전쟁비용으로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 은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증가된 은 수요는 세계의 은광 개발을 촉진하게 되었습니다. 임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은 평양에서 함경도 단천으로 공격해 갔는데 단천에 은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란 당시 조선의 민간인 10만명을 잡아갔고 노예무역 전문이었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겼습니다. 비극적인 세계화의 일면입니다. 그 대산이 우리 조상이었던 것이 분노를 느끼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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