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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이자 임진왜란의 척후병 황윤길 vs 김성일

by 선라이저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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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몇 년전 안동을 세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안동의 여러 곳을 돌아 보았습니다. 류성룡 자택을 가본 것과 수백년 동안 내려온 류성룡과 김성일의 '병호시비'(이황의 제자인 두 사람을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에서 제사지낼 때 누가 높은 자리인 좌배석을 하는가 하는 문제. 4살 위 김성일인가, 영의정 류성룡인가하는 문제)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오늘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인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1. 황윤길과 김성일은 누구인가

 

 황윤길은 황희의 4대손으로 1561년 문과에 급제 후 병조참판에 이르렀습니다. 김성일은 류성룡과 동향인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제자였습니다. 

 

  조선의 왕실 최초로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이자 후궁의 손자인 선조가 즉위하자 붕당이 발생하였습니다. 왕의 외척인 심의겸(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을 통해서 왕권을 견제하려는 서인과 이에 맞서 외척을 척결하려는 동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정통성이 약한 왕이 즉위할 경우 어김없이 붕당은 발생했습니다. 

 

 동인이 절대 우세한 속에 서인이었던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김성일이 각각 정사와 부사로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습니다. 

 

2.  일본을 다녀온 결과

 

 1591년 일본을 1년이나 걸쳐 다녀올 때 황윤길은 쓰시마섬에서 조총 2정을 받아 가지고 왔고 부산에서 장계를 올려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임을 알렸고 선조에게도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이어 김성일은 그런 징조는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김성일과 같이 일본을 다녀온 허성은 동인이면서도 김성일에 반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이야기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도 율곡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성일과 그가 속한 동인은 "나라가 강해지면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진다. 정치란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좌절시켰습니다.  

 

 선조에게 김성일의 보고와 관련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윤길과 다른 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역시 일본이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아 이를 해명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조때 남인(류성룡과 김성일도 이후 남인이 되었음)이었던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조선 사신의 방문과 관련 "황윤길은 관백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개 교위를 관백이라고 속여 우리 사신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자를 타고 입궁하도록 했고, 모시는 신하가 몇 명 뿐이었으며, 떡 한 접시와 탁주 두 잔만 차려 놓았던 것입니다. 황윤길은 이같은 속임을 당했는데도 귀;국하여 이 일을 보고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나자 한양으로 잡혀가다가 죄를 묻는 것보다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하다는 류성룡의 청으로 이후 경상도에서 여러 활약을 하였고 진주성에서 병사하였습니다. 황윤길은 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상징 대나무
일본의 상징 대나무

 

 

3. 결

 

  선조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진 붕당은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 당파싸움으로 확대되어 조선 후기를 이어 나갔고, 조선 말기에는 안동김씨, 풍양조씨 같은 세도정치로 이어 졌습니다. 안동김씨는 조선말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 왕의 외척으로 세도정치를 행한 김조순부터 이어지는 신 안동김씨입니다. 이들은 종로구 부암동에 몰려 살았습니다. 자하문 건너 부암동을 걸으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이를 타파한 흥선대원군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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