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산 기장군 일광읍 화전리 출신 박진규 시인의 화엄사 중소(中沼) 시를 소개합니다.
1. 화엄사 중소(中沼)
화엄사 중소(中沼)
박진규
갈겨니는 계곡 물빛이어서
계곡이 아무리 유리알처럼 투명하여도
자신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하루 종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상수리나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갈겨니
그 여리디여린 몸이 가을빛을 받아
바닥에 지 몸보다 다 큰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상수리나무는 행여 배고픈 날짐승이 눈치챌까봐
아침부터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어린 갈겨니를 덮어주었던 것이다
2. 하상일 문학평론가의 시 해설
박진규의 시에는 자연과의 대화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는 자연에게 말을 걸고 자연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자연의 마음과 생각까지 이해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주체의 시선으로 자연을 포섭하려는 인간중심적 서정시의 모순과 한계를 뛰어넘어, 자연과 더불어 놀며 이야기하며 생각하는 평범한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된다.
'자신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는' 갈겨니는 어리석음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인간의 모습을 빗대고 있다. 자신은 '계곡 물빛'을 닮아서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한 태도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 여리디여린 몸이 가을빛을 받아 바닥에 지 몸보다 다 큰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배고픈 날짐승이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오히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과잉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닮은 갈견를 보면서도 실망하거나 외면하기 보다는, 그것을 말없이 이해하고 바라다봐주는 '늙은 상수리나무'에게 슬며시 마음을 뺏긴다.
어리석은 '갈겨니'를 질책하거나 무시하기는커녕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뜨려 어린 갈겨니를 덮어주는" 상수리나무의 마음에 깊이 다가서려 한다. 즉 자연의 따뜻함으로 인간의 상처와 모순을 감싸 안으려는 화자의 시선이 '늙은 상수리나무'의 마음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3. 결
박진규 시인은 울산 학성고와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수산교육과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신문사, 잡지사를 거쳐 부경대 홍보팀장으로 일을 해 왔습니다. 기장문학회에서도 일을 해 왔습니다.
그의 시는 일상 어디서든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스럽지 않고, 자연의 순리앞에서 인간적 삶의 상처와 모순을 성찰하는 깨달음의 시선도 두드러집니다. 주체의 시선 안에서 자연을 맹목적으로 읽으려는 태도를 버린 채, 자연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귀 기울여 그 속내를 읽어내려는 태도 그 자체가 시로 형상화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어떤 작위도 없고 형식이나 구조에 대한 치밀한 계산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일상 한 가운데 우리가 쉽게 놓치고 살아가는 자연들과 도라도란 대화를 나누는 동화적 상상력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겨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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