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안산평생학습관에서 위대한 19세기의 천재들 이야기 중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사는 유럽의 미술관들을 다니면서 미술을 공부한 인문학 강사였습니다.
1. 프랑스대혁명 발생
프랑스대혁명(1789년) 당시 프랑스는 제3신분(평민)이 2,450만명으로 인구의 98%를 차지하였습니다. 제1신분(종교인)과 제2신분(귀족)은 각각 12만명과 40만명으로 합계 2%를 차지했습니다.
혁명은 느닷없이 닥쳐오지만 오랫동안 누적된 결과가 타오르는 것일 뿐입니다. 도저히 그 방법 말고는 달리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때 가차없이 역사의 문턱을 넘어 섭니다.
조선 정조 때인 1789년 프랑스는 진보파인 자코뱅파와 보수파인 지롱드파가 격돌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아버지와 나폴레옹도 자코뱅파였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인근 오스트리아의 합수부르크왕가 등 왕정 국가들은 기존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7차례에 걸쳐 프랑스에 대항한 동맹을 만들어 프랑스를 위협하였습니다.
2. 나폴레옹의 등장과 패배
나폴레옹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서양 인물입니다. 그가 알프스를 넘으면서 말을 타고 있는 그림 속에서 보여진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그의 말은 한국 사람들에게 쉽게 와 닿았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과 달리 당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힘들게 넘는 그림도 같이 있습니다. 당시 그를 보는 사람마다 시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전 코르시카섬의 반발에 힘겨워하던 이탈리아 제노바가 프랑스에 프랑스 남동쪽이자 로마를 맞보고 있는 코르시카섬을 프랑스에 할양했습니다.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은 장군과 제1부통령, 황제를 지냈습니다. 그는 최초로 프랑스에 국민 교육을 시작하는 등 근대의 문을 연 인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념은 계몽적 민주주의였고 민족주의였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을 가르켜 "저기 말을 탄 시대정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이기고 러시아를 공격하는 등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지역으로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여 프랑스인의 자부심을 높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이집트를 점령해 영국이 인도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써 영국의 재원을 고갈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143명의 고고학자를 동원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발굴하였습니다. 이집트를 점령했으나 해군이 나일강전투에서 영국에 패하여 이집트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투르크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랑스가 전쟁을 통해 퍼트린 민족주의는 거꾸로 다른 국가들의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폴레옹은 1차 유배지로 정해진 코르시카섬 우측에 있는 이탈리아에 가까운 엘바섬을 탈출해 재기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12만 5천명 프랑스군은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9만 5천명과 프로이센 12만명과 벨기에 남부 워털루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퇴시키고 다시 영국군을 공격하여 전세가 프랑스군 승리로 기우는 듯 했으나 퇴각했던 프로이센군 6만명이 다시 기습을 하여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100일 천하로 끝났으며 워털루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과의 23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습니다.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남단 앙골라 근처 영국령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3. 결
나폴레옹의 패배로 프랑스의 영토는 프랑스대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의 영향은 근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로 표현되는 프랑스국기가 상징하듯이 프랑스대혁명의 사상은 봉건 군주제의 유럽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을 우러러보았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실망해서 그를 위해 만든 교향곡의 이름을 영웅교향곡으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시대의 키워드를 들고 가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나폴레옹은 19세기 시대의 얼굴이자 시대의 정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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