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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인정머리 없이'의 유래 (조선 후기 대동법 시행 이야기)

by 선라이저 202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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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인정머리가 있어야지...

 

  살아가면서 이런 말들을 듣거나 하곤 한다그 속뜻을 알고 나니 김육이란 분을 알게 되었다. 김육은 조선 후기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줄여주고자 대동법 확산에 평생 몸 바친 인물이다. '역사의 쓸모'(저자 최태성)라는 책에서 김육과 대동법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한편, 부산 여행을 하면서 해운대에서 송정 터널을 지나 동해 바다를 보면서 기장 바닷가 길을 20~30분 쭉 올라가다 보면 요즘 가장 핫한 죽성리 성당 세트장을 만나게 된다.  언덕 위에 지어진 성당 세트장 부근 매바위(현지의 말로 매방)에는 공덕비가 새겨져 있는데 대동법에 따라 쌀을 싣고 가던 배가 침몰해 바다에 빠진 쌀을 건져 먹는 주민이 곤혹을 겪었다는 이야기다. 대동법과 연관되어 아래에 같이 첨부하였다. 

 

2025.01.27-부산 기장 최고 관광지 성당세트장 옆 매바위에 적힌 글

 

1. 대동법의 시행 배경

 

 

  대동법이란 쌀로 세금을 내는 공납 제도인데 공납을 대신 내주는  방(막을 방, 防)납업자가 사또와 결탁했고 사또에게 주는 뇌물이 '人情(인정)'이었다.

 

  백성이 내는 세금은 크게 세 종류였는데 전세, , 공납이다. 

 

  전세는 토지에서 생산한 것의 일부를 내는 것으로 소득세에 해당한다. 역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요역(궁궐, 길 만들 때)과 군역(국방의 의무)을 말한다공납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것으로 백성들에게는 공납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이 때 수수료를 받고 공납을 대신 내주는 대행업자인 방납업자가 등장하였다.

 

  사또는 방납업자의 특산물만 받았다. 백성들은 무조건 방납업자에게 공납을 맡길 수 밖에 없었고, 방납업자들은 마음대로 값을 올렸다. 방납업자들이 사또에게 사례비를 주는 돈을 당시에는 인정(人情)이라 했다. 인정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부정부패를 의미한다.

 

  한편, 대동법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었다. 그냥 쌀로 세금을 내자는 것이다. 

 

  대동법은 토지에 부과된 세금으로,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되었다대동법은 토지 한 결마다 세금이 매겨져 땅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다양반 지주에게는 중세가 되었고, 조정 대신들은 반대했다.

 

2. 김육과 대동법 시행

 

  광해군은 영의정 이원익이 강력하게 밀어부쳐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했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는 100년이 걸렸다.

긴 시간 동안 대동법 확산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김육이다.

 

  김욱은 1580년 태어났다. 12살 때 임진왜란 터져서 아버지를 잃고 10대 소년 가장이 됐는데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는 과거에 합격해 24살에 성균관에 들어갔다4년 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은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라는 상소를 올렸다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렇게 다섯 명의 학자를 문묘에 모시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북인 수장이었던 정인홍은 이를 반대했고, 광해군은 정인홍 편을 들었다성균관 유생들은 심하게 반발했고 처벌을 받아 대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영창대군이 살해되는 등 조정의 혼란이 심해지자 김육은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귀농을 했다. 

 

  가족을 데리고 가평 잠곡에서 숯 장사를 했다한양까지 왕복 160km를 걸어서 다녔다한양을 오가면서 그는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았다.

 

  김육의 좌우명은 애물제인(愛物濟人,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을 구제하자는 뜻)이다. 그는 공납 문제에 관심 가졌다. 직접 노동을 하고 세금을 내면서 제도의 모순을 절실히 느꼈다10년이 지난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 세상이 바뀌었다. 그는 관직 제의를 받았다.

 

  그는 공납 문제 해결이 주 관심사였다. 관직이 낮아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고위 관직을 위해 과거 시험을 또 보았다. 장원 급제를 했다최종 시험 문제는 현실 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논하라는 문제였다책만 달달 외운 사람들과는 답의 차원이 달랐다. 

 

 그의 나이 40대에 병자호란이 발생했다제대로된 정치 생활은 50대가 되어서 였다. 전쟁이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자 바로 대동법 이야기를 꺼냈다경기도에서만 시행(광해군 시절 1608년 시행)되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게 김육의 목표였다.

 

  그는 대동법에 인생을 걸었다. 대동법 확대 시행을 끊임없이 주장했고 반대로 양반들은 반대를 거듭했다전세는 토지 1결당 쌀 4~6였으나 대동법은 1결당 12두가 부과되었다땅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전세의 두세 배나 되는 부담을 추가로 지니까 세금 폭탄이었다. 그는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오직 모리배들 뿐입니다!"라고 직격했다.

 

  대동법 확산의 길은 험난했다인조가 사망하고 70세의 나이에 효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김육 을 붙잡고자 했다. 김육은 효종이 자신의 사직 상소를 일곱 번이나 물리치고 계속 벼슬을 내리자 마침내 조건을 내걸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에 주면 일을 하겠다고 했다. 드디어 충청도에도 1651년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대동법 시행 후 김육은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성리학이며 양명학이 무슨 소용인가. 백성이 잘 살면 최고지." 이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자 마자 이번에는 대동법을 전라도까지 확산하기 위해 김육은 또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전라도는 최고의 곡창지대이다. 양반들은 완강하게 반대하고 버텼다. 70세에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렸다. 자기가 죽고 나면 대동법 시행이 취소될까 봐 너무 두렵다고 효종에게 마지막 간청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육은 호남까지 대동법이 확대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유언에 따라 호남에도 1658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숙종 대에 되어서는 경상도에는 1678년, 황해도에는 1708년 등으로 확대되었다. 평안도, 함경도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대동법 시행
대동법 시행

 

3. 결

 

 

  조선 후기 우리 역사에서 대동법 시행에 지대한 공을 세운 김육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을 사랑해 대동법을 충청도, 전라도까지 확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부산 여행을 계획한다면 부산역에서 차를 렌트해서 1) 아난티가 있는 기장 연화리 마을에서는 죽도까지 이어진 다리를 건너가 보시고, 2) 연화리에서 인접한 5분 거리 봄 가을에 멸치 털이를 하는 대변항(말린 해산물을 파는 가게가 많음)을 갈 수 있습니다.

 

 3) 대변항을 끼고 지나 멋진 바닷가 경치를 보면서 죽성리 월전마을(아나고 구이로 유명함. 부둣가에 포장마차촌도 있음)까지 드라이브를 하면서 바닷가 전망의 멋진 카페들에서 쉴 수도 있습니다.  4) 월전마을과 인접한 제 고향 두호마을의 성당세트장과 황학대에 올라 바다 경치를 보시고, 5) 4층으로 깔끔하게 지어놓은 기장시장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시장내 지하 회센터에서 회를 드실 수도 있습니다.

 

6) 기장시장에서 10여분 거리 일광 해수욕장에서 모래를 밟아 보시고 인근의 일미아구찜으로 유명한 학리 마을까지 가는 부산 여행 코스로 하루를 보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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