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가 몰랐던 서울 이야기' 책에서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를 알아 보았습니다.
1. 서울이라는 명칭
서울이라는 명칭은 순우리말로서 신라때부터 수도, 나라, 큰 도시라는 의미의 이두로 사용되었습니다.
양주동 박사에 의하면 서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보이는 서벌, 서나벌, 서라벌, 서야벌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한 것입니다. 즉 서울은 '새로 생긴 벌' 또는 '새로 생긴 성'이라는 뜻입니다.
2. 서울의 역사
서울은 백제가 기원전 18년부터 1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서울)이 무너지기 까지 493년간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 고구려는 551년 신라, 가야,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북쪽으로 물러납니다. 신라는 나제동맹(433~553년)을 깨고 554년에 한강유역을 확보하였습니다.
서울은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의 문화유산이 발견된 유일한 곳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으로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고려시대에 서울은 양주라고 불리었으며 1067년 남경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고려말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고려의 흔적은 강참찬 장군의 집터인 낙성대입니다.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은 한양이라는 수도로 거듭나고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km의 성곽(방어라기 보다는 경계를 포시하는 수준)을 쌓았고,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을 지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 조선의 5개 궁궐인데, 그 중에서 창덕궁이 조선의 왕이 가장 오래 살았던 궁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24년 이괄의 난, 1637년 병자호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붙타는 등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컸습니다.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에서 주로 생활했습니다.
영/정조때 한양은 8만가구에 3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종로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최고의 번화가였으며 술집이 번성하였습니다.
남성들이 술판, 도박판, 기생집, 활터 등을 자유롭게 놀고 다녔다면 여성들은 소설을 빌려 읽는 열풍이 불었다는 것이 조선 후기 한양의 색다른 풍경이었습니다. 독서 수요가 증가하자 소설책을 배껴서 돈을 받고 빌려주는 세책집이 등장하였고 세책집의 소설 종류가 100종이 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영화와 TV 드라마 등에 열광하는 현상의 원류가 조선 후기 소설 열풍이기도 합니다.
1870년 중반 한양의 젊은 양반 사이에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하나의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청나라를 몰아내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만에 막을 내립니다.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고종은 1896년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하게 됩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초대 황제에 즉위합니다. 전기, 전차, 전화, 철도 등 근대 문명을 도입하면서 서울 시민들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았지만 일본 등 외국 세력의 간섭으로 근대 국가로는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한일합방 후 조선은 서울의 궁궐을 많이 파괴했습니다. 경북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립하였습니다. 창경궁에는 공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을 창경원으로 변경하였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서울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3. 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의 일극 중심의 도시였으며 광복 후에도 현대사의 중심인 도시입니다. 이제 서울은 한류를 동경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방문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외국의 많은 도시와 명소를 다녀보았지만 정작 서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술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대하고, 자기에게 질문하는 자에게만 속삭인다"고 합니다. 서울을 걸으면서 수도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씩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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