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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부산 앞바다

by 선라이저 202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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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5월 18일 아침 부산에서 고교/대학 동창인 J군이 글을 보내 왔다. J군은 항공기 엔진 엔지니어로 삼성에어로스페이스에서 퇴직을 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큰 울림이 있어 같이 나눈다. 

 

1. 부산 앞바다 요트 여행


부산 앞 바다에서 요트를 탔다. 파도가 좀 높았고 배 흔들림도 있었다. 배를 타고 전쟁을 했던 그 때가 생각났다...
부끄러움과 반성의 기록
이들은 양력으로 5월 23일 부산 앞바다로 몰려왔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그 날의 일을 [선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의 배가 바다를 덮으며 몰려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그때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조공하러 오는 일본배라고만 생각하고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진陣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에 올랐고, 정발은 혼란 중에 죽었다. 다음 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며 우리나라를 폐허나 다름없게 짓밟아 놓았다.
 
 
 
부산 앞바다
부산 앞바다
 
 
 
2층과 3층을 오가는 광안대교
2층과 3층을 오가는 광안대교
 
 
(멀리서 해운대 70~80층 아파트 마천루를 쳐다보니 뻘로 가득찼던 석호에 세운 베네치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류성룡의 징비록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대로 서술한 전쟁기록이다. 징비록의 지은이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위 관직에 있었고, 전쟁 중에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으로서, 또 전시 총사령관 격인 도체찰사로서 전쟁 수행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때로는 조정의 높은 관리로서 장수 임명에 관여하고, 때로는 전쟁터를 누비면서 전략을 세우고, 때로는 명나라 장수의 접대를 맡아 명나라 군대와 우리 군대의 작전 계획을 의논하는 등, 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만큼 전쟁을 누구보다 대국적이고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내외 문헌 중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까닭이다.
 
 옛 사람이 말했었다. "장수가 병법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주게 된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적 을 추격하여 조령을 통과하면서 탄식한 일이 있다. "이렇게 좋은 요새가 있는데도 지킬줄을 몰랐으니, 신립 총병은 전략을 세울 줄 몰랐다고 하겠다."
 옛날 조조가 병법에 대해 자기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할 때는 꼭 필요한 조건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유리한 지점을 확보할 것과, 둘째, 군사들이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혀 있을 것, 셋째, 무기가 예리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군사 작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며 승부를 결정짓는 관건으로, 장수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일입니다."
《시경詩經》에 "내 지나간 잘못을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조심할거나" 란 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징비록(징계할懲 삼가할毖 기록할錄)
 
원작 류성룡, 글 이동환, 현암사
 
 

 

징비록
징비록
 
 
 

3. 결

 
 
 징비록은 서애 류성룡이 지은 현장의 기록이다. 이 책에 나온 인물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의 과오에 대해 이를 덮으려고 수많은 태클을 걸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징비록이 있어 우리는 임진왜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임란이 발발하기 전 일본에 파견했던 같은 안동 출신 김성일이 일본이 쳐 들어 오지 않을 것으로 선조에게 이야기한 것과 관련 후일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물어보자 정사 황윤길이 이미 일본이 쳐들어 올 것 같다고 하자 부사인 자신도 이에 동조하면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질까 싶어서라고 했다. 
 
 후일 김성일은 임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로 동분서주했다. 몇 년전 안동의 대학에서 일본문화 연구를 했던 선배를 만나러 안동에 들르면서 안동에는 서원이 많이 있고 병호시비(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의 500년간 지속된 분쟁)가 저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황이 죽자 그의 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을 두고 누구를 더 높은 지위의 좌배석 자리에 두는가 분쟁이다. 
 
 직급이 높은 류성룡(풍산 류씨)과 나이가 더 많은 김성일(의성 김씨)은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이 분쟁은 흥선대원군도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 역사는 돌고 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분쟁을 지속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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