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서강대 로스쿨에서 행정법을 강의하고 있는 김광수교수의 '읽고, 쓰고, 실천한다'는 책 속에서 조광조와 기묘사화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암 조광조는 중종 때 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갔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은 반정 이후에 조광조를 등용하여 국정을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1519년 중종은 조광조 등 개혁파 대신들을 숙청함으로써 도학정치의 길을 팽개쳐버리고 혼군의 길을 걸었습니다. 알아야 보인다고 저에게는 요즘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1. 주초위왕
대사헌 조광조를 음해하는 세력들은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먹게 하여 주초위왕이라는 글을 만들었습니다. 한자로 주초는 합치면 조를 만드니 이는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무고였습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적을 만든 만든 계기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소격서의 폐지입니다. 소격서는 도교의 원리에 따라서 해와 달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기관이었는데 유학의 원리에 충실한 조광조 등의 건의로 1518년 폐지되었습니다.
둘째로 현령과의 실시입니다. 1519년 조광조의 건의로 과거시험이 아니고 천거에 의하여 재능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였습니다. 육조 및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들이 인재를 뽑아서 예조에 추천하면 왕이 최종적으로 선발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때 추천된 120명 중 중종이 직접 면접을 보아 28명을 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인원의 다수가 조광조 등 신진세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기성의 관료들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셋째 위훈삭제입니다. 중종반정시 공훈록에 올라간 103명의 정국공신 중 78명이 공훈기록이 정확하지 않거나 연산조에 충성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삭훈되고 25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훈삭제는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는데 이들이 조광조 제거에 직접 가담하였습니다.
2. 체포와 재판
조광조는 경연에서 중종에게 도학정치와 근독을 강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중종도 그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고 들었으나 점차 귀찮게 여겨 얼굴을 찡거리고 하품을 하였는데 정암은 자신의 강설에 취해 그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전 세 시에 불러 들어간 조광조는 먼저 잡혀있는 동지들을 발견하고 이게 아닌데 하며 현실을 부정하다 술을 나누어 마시고 대취하여 심문에 대답도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조광조에게 적용된 죄명은 '붕당죄'였습니다. 김정, 김식, 김구 등과 붕당을 맺어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요직에 나가게 하고, 서로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을 공격함으로써 국론과 조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광조는 끝까지 부인하다가 화순으로 귀양을 갔고 이어 사약이 내려 졌습니다.
3. 평가
조선시대 정치는 사대부, 훈구, 사림, 세도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사림을 대표하는 정암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도학 태평성세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어야 했습니다. 중종은 권신들 힘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믿었던 중종이 변심을 하고 홍경주, 남곤, 심정 등과 뜻을 같이 하여 불의에 눈감는 순간 조광조가 밟을 수 있는 땅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은 직제학이 되었고, 그 문하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흔이 배출되었습니다. 사후에 족항조는 추증되고 남곤은 관직이 박탈됨으로써 후대는 조광조를 도학정치의 선구자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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