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축성 측면에서 살펴본 진주성 전투

by 선라이저 2022. 11. 28.
반응형

 안녕하세요. 저는 우리나라 축성에 관심이 있었고 '한국의 성곽'이라는 책에서 진주성 전투를 중심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1. 조선 후기의 축성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의 심상치 않은 동정에 조정에서는 비로소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남쪽 3도의 방비를 서둘렀습니다. 경상, 전라, 충청 감사를 그 지방 사정에 밝은 사람으로 뽑아 보내어 병기를 준비하고 축성을 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경상도에 성을 많이 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평화 생활에 젖은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하여 지금같이 태평한 시절에 성을 쌓는 일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경상감사 김수는 성을 쌓는 일에 힘을 기울여 가장 많은 성을 쌓았으나, 험준한 위치를 선정하지 않고 평지에 쌓았으며 또 규모만 넓게 잡아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대규모의 전쟁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왜군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야 패전의 원인이 평야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산성 축성의 부족을 깨닫게 된 조정에서는 험준한 산을 의지히여 성곽을 설치할 것과 산성을 쌓을 것을 논의하였고 산성 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조령 일대에 관문 설치를 검토하였고 제천, 단양, 남원, 정읍, 합천, 지리산, 가야 등에서 산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왜군이 퇴각한 후 전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승군이 동원되어 지역내에서 장기전에 대비하여 축성을 서둘렀습니다. 한 편 조선에 장기간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도 울산으로부터 거제도에 이어지는 해안지역에 20여 개의 일본식 성을 쌓았습니다. 왜성으로 불리는 이들 성들은 이중삼증으로 튼튼한 아성을 쌓고 그 외곡에 다시 외성을 쌓는 방식이었습니다.

 

 임진, 병자호란으로 수도를 적에게 유린당하였던 조정에서는 도성 수비와 축성 논의가 분분하여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강화산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2. 진주성 싸움

 

  적은 경상도의 요충인 진주성을 함락시키고자 2만 여 병력을 동원하여 일거에 유린하려고 하였습니다. 진주성을 지키던 목사 김시민은 성문을 굳게 닫고 3,800명의 군사로 적을 잘 막았습니다.

 

 선조 25년 10월 5일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적의 대병력은 삼면에서 진을 치고 성을 압박하였습니다. 7일밤 적들은 동문밖에 수백보 되는 길이로 큰 대나무를 엮어 세우고, 그 안에 판자를 또 세운 뒤에 흙과 돌로써 층루를 언덕과 같이 만들더니, 높이가 성벽 높이와 같아 적은 그 위에서 조총을 쏘며 성을 엿보았습니다.

 

 또 8일에는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멍석으로 덮은 뒤 성벽을 기어 올라가게 하였으며, 3층이나 되는 산대를 만들어 바퀴를 달아 끌게 하는 등 여러 계책을 썼으나 성안에서는 비격진천뢰와 화약포를 쏘아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10일에 적은 동문을 공격하고 나머지 1만명은 북문을 쳐들어왔는데, 김시민은 비격진천뢰와 화살, 큰 돌과 끓는 물, 불붙은 짚단을 던져 적의 공성을 지연시켰습니다. 싸움이 이렇게 며칠간 계속되었으나 적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10월 10일 퇴각하였습니다.

 

 진주성에서 패퇴한 적은 이듬해 6월 19일 지난 번 패전의 원한을 갚기 위해 93,000명의 대병력으로 재차 공격하였습니다. 적의 공성법은 다양하여 성문 밖 다섯 곳에 큰 언덕을 만들어 놓고 울타리를 세운 뒤 공격을 하는가 하면, 귀갑차로 성벽 밑에까지 육박한 뒤에 철퇴로써 성벽에 구멍을 뚫기도 하였습니다.

 

  6월 29일 동문 성벽 밑에 접근한 적이 성벽의 큰 돌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이 무너지면서 적은 이 틈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11일 만에 성이 함락되고 왜군은 성안에 있던 6만여 명의 백성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김천일 이하 수성군은 적과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서양의 요새 성
서양의 요새 성

3. 결

 

 

 우리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자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입니다. 성돌을 운반하기 위해서 목도(나무길)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시절에 백성들의 노역이 힘들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곽은 쉼없이 축성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은 성곽의 나라'라는 표현까지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도성은 자연의 형세를 이용하여 꾸불꾸불 굽이쳐 돌아갑니다. 네모 반듯한 중국의 성이나 관사를 중심으로 성을 쌓는 일본의 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입니다. 외적이 침입하면 군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함께 성에 들어가 함께 싸웠습니다.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허물어진 성벽 한 자락에서 우리는 조상의 국토 수호에 대한 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