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톨스토이가 느낀 '19세기 중반 러시아 국력의 한계와 좌절'

by 선라이저 2023. 1. 21.
반응형

  윤석철 교수의 '삶의 정도'에서 이야기하는 '톨스토이가 느낀 19세기 중반 러시아 국력의 한계와 좌절'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1.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 톨스토이

 

   대포와 총과 같은 전쟁용 수단매체의 한계가 그 나라 국력의 한계를 만들어 냅니다. 톨스토이(1828~1910)는 1855년 조국 러시아의 장교로 크리미아(크림) 전쟁(1853~1856)에 참전했습니다. 크리미아 전쟁은 러시아가 영불 연합군과 싸운 전쟁입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100여 년에 걸친 산업혁명을 마치고, 그 결과로 얻은 경제 및 기술 발전에 의한 신식 대포와 소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들의 사정 거리는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구식 대포와 소총에 비해 3배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수단매체의 수준에서 영불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연전연패하는 러시아의 한계를 몸소 느끼고 온 톨스토이는 그 후 러시아가 '잘 사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 죽는 날까지 집요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상가가 됩니다.

 

 2. 톨스토이의 좌절

 

  당시 러시아는 일부 극소수의 황족과 귀족들만이 넓은 농토를 점유하며 많은 농노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농노에게는 인권이 없었으며 노예 신분으로 매매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 이하의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강의와 저술을 통해 러시아가 후진국에서 탈피하여 서구 선진국과 같은 산업 국가로 발전하려면 귀족들이 농토를 산업용지로 내어놓고, 농노들을 해방시켜 산업 역군이 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러시아 상류층도 톨스토이의 생각이 옳다는 데는 동의했으나, 자신이 소유한 농토와 농노들을 내놓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사색과 고뇌를 거듭하던 톨스토이는 말년에 이르러 자기가 소유했던 농토를 농노에게 배분하였고 농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헴릿처럼 장황하고 돈키호테처럼 행동한 톨스토이의 결단에 의해 톨스토이 가족은 하루 아침에 가산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 베르스 여사의 반발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자의 반열에 오른 톨스토이였지만 부인의 반발을 참지 못하여 1910년 10월 28일 가출을 감행했고, 가출 후 20여 일 만에 러시아 서부의 한적한 간이 기차역 아스타포보의 역장 관사에서 객사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죽고 불과 7년 후인 1917년,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 났습니다.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은 재산을 강제로 몰수당했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농노들은 스스로 해방되어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지 1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러시아는 여전히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서유럽 국가들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산업혁명은 산업용 토지, 생산설비, 설비를 돌릴 에너지 등 산업용 수단매체의 수준을 높이는 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은 수단매체의 수준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수단매체의 주인들만 바꾸는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국기와 영토
러시아의 국기(흰색, 파랑, 빨강)와 영토

 

 

3. 결

 

 

  크리미아 전쟁 후 260 여 년의 역사가 흐른 오늘날 산업용 수단매체의 혁명이 인간을 잘 살 수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 톨스토이가 고민한 '러시아가 잘 사는 법' 역시 산업용 수단매체의 고도화를 통해서나 가능할 뿐이었습니다. 

 

  수단매체를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조건이 만족되어야 하지만, 당시의 러시아 사회는 그것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