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국이 해전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을 이긴 이후 빅토리아여왕의 영국 전성 시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나폴레옹 이후의 빈 체제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을 전파한 나폴레옹이 패한 이후 유럽 대륙은 오스트리아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 주도로 1815년 빈회의 이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반동, 보수의 체제로 회귀하였습니다. 하지만 빈 체제에 대한 저항 속에 1848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혁명으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빈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마왕은 누군가가 끊임없이 감시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담아 내었습니다. 마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안고 폭풍우 속에서 말을 달립니다. 아이는 마왕이 보인다고, 마왕이 자신을 데려가려 한다고 웁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마왕이 자신과 함께 영혼의 나라로 가자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못한 채 아이에게 바람 소리이고 안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더 빨리 달립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품안의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2. 해가 지지않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전성시대
두번의 해전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을 이긴 자신감을 가지게 된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이 18세에 등극하여 64년 재위기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웠을 만큼 대영 제국의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과 결혼한 독일의 앨버트 공은 1851년 런던에서 유리 천장을 가진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16만 파운드의 수익을 냈을 뿐 아니라 영국의 높아진 위상을 대내에 과시하였습니다.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영국 왕실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양당 구조는 여왕이 선호하였던 휘그당(1765년 자유당, 1830년 노동당으로 개칭)과 함께 보수당(1679년 보수당, 1834년 보수당)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여왕 시절 자유당과 보수당은 '상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처럼 서로 싸우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1857년 인도의 세포이항쟁을 진압한 후 1877~1901년에는 인도 제국의 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제국주의 약탈을 상징하는 186캐럿의 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어는 빅토리아 여왕의 앙관에 박혀 있으며, 인도로 반환되지 않은채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수여되어 지금도 런던 타워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영국은 역설적에게도 미국을 잃고 난 이후 부터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영국 해군으로, 세계 2,3위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영국이 더 큰 해군력을 가진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이후 1차 대전까지 영국 해군은 세계 1위의 해군력을 보유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16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는데 영미권으로 전파된 것은 1841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고향의 풍습에 따라 윈저궁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웠고 이를 그린 목판화가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퍼졌습니다.
여왕은 고집이 센 성격이었고 앨버트 공과 싸움이 나면 앨버트 공은 서재로 도망을 가서 문을 잠구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여왕이 노크를 하면서 '영국 여왕입니다.'하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당신의 아내입니다.'하면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제1차 산업혁명에도 성공하였습니다.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1894년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증기기관차는 시속 50키로의 놀라운 속도로 달렸습니다.
3. 결
적의 침략은 저항할 수 있지만 자기 시대가 찾아온 사상(시대적 사상)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는 봉건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인간성이 회복되어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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